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위컴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1928년]] [[6월 25일]]에 [[뉴욕]]의 돕스페리에서 태어났다. 1946년에 [[미국육군사관학교]]를 진학하여 1950년에 졸업, [[임관]]하였다. 1956년부터 1960년까지 육군사관학교에서 사회과학 교관을 맡기도 했다. [[병과]]는 [[보병]]으로 처음에는 제18보병연대에 배속되었고 [[베를린]]에 주둔한 제6보병연대에서도 근무했다. [[한국전쟁]]에도 참전했다. [[위탁교육]]으로 [[하버드 대학교]]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았고 군내보수교육기관인 국방전쟁학교와 국방참모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. 나중에 제5기병연대 1전투단[* 영어로 battle group이며 5개 [[중대(군대)|중대]]로 구성된다.]에서 복무할 때 다시 한국에 왔다.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소속으로 [[베트남 전쟁]]에 파병되기도 했다. 베트남전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했다. [[장성급 장교|장관급 장교]]로 진급한 뒤에 주독미군 소속의 제3보병사단 제1여단장을 맡았다. 베트남군사원조사령부(MACV) 부참모장으로 [[포로]] 석방 협상을 맡기도 했고 [[제101공수사단]]장과 [[합동참모본부]] 수석본부장[* Director of the Joint Staff. 합동참모본부의 주요 본부장들(주로 2,3성 장군 및 제독들이 각 부처의 본부장. 간혹 준장급 장성들도 있다. 대개 국방부 민간 고위관료들이 보직하여 교차임무를 수행한다.)을 통솔하는 3성급 보직으로, 미군에서 이 보직에 오른다는 것은 사실상 대장 진급이 99% 확실하다는 뜻이다. 위컴 이후 주요 인물로는 [[노턴 슈워츠]], [[월터 샤프]], [[스탠리 매크리스털]], [[로이드 오스틴]], [[커티스 스캐퍼로티]] 등이 있는데, 위컴 이후로 이 보직을 거친 이들은 전원이 대장으로 진급했다.] 등을 거친 뒤에 [[대장(계급)|대장]]으로 진급하여 [[1979년]]에 [[존 베시]]에 이어 [[주한미군]]의 최선임자인 [[한미연합군사령부]] [[사령관]]이 되었다. 위컴의 한미연합군 사령관 재임 기간 동안 [[10.26 사건]], [[12.12 군사반란]]과 [[5.18 민주화운동]]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. 일단 위컴 본인은 한국의 [[민주화]]를 지지했고, [[신군부]]의 쿠데타 저지를 위해 노력했다.[* 당시 미국 정부는 독재자 킬러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던 [[지미 카터]] 행정부였다. 당연히 전두환의 쿠데타를 괘씸하게 여겼지만, 북한이라는 변수 때문에 1.주한미군 및 비밀리에 파견된 특수전부대 투입, 2.반 하나회 군인들에게 역쿠데타 지원, 3.전두환과 타협 이 3가지 노선 중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다. 존 위컴은 1번과 2번 노선을 지지했지만 CIA 한국 지부 간부와 대사측은 군사작전을 하면 내정간섭이고 역쿠데타 지원을 하다가 실패하면 내정간섭 및 국제적 망신이 될 수 있다며 꺼렸다. 이렇게 미국이 고민하던 사이 전두환 군부측이 정적 및 군사정변때 체포한 이들의 권력을 박탈하는데 성공하자 미국측은 어쩔 수 없이 3번 노선으로 타협했다.] 12.12 군사반란 당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맹호부대와 전방 일부 사단을 빼서 진압하겠다는 것에는 반대를 표했다는 이유로 전두환을 도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, 이건 존 위컴 입장에선 살짝 억울할 수도 있는게 당시 박정희가 암살당하면서 북한이 무슨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전방 병력을 빼내서 진압을 시도했다가 내전으로 격화되면 북한이 이틈을 노려 침공을 할 여지도 있었기에 억제력을 위해 주둔하는 장군으로써 일단은 본분을 한 것이다. [[전두환]]을 견제하기 위해 수감 중이던 [[정승화]] 장군에게 [[생일]][[케이크]]와 축하카드를 보내는 등의 행동을 했다고 한다. 이후 위컴은 [[서울의 봄]]이 실패하고 사실상 [[전두환]]이 집권할 일만 남자 실망하여, 전두환이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다음날인 1980년 8월 8일 의 샘 제임스 기자와 AP통신의 테리 앤더슨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전두환이 한국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며 "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마치 [[나그네쥐|레밍]] 떼처럼 그의 뒤에 줄을 서고 그를 추종하고 있다"라고 비아냥거렸다. 참고로 저 발언에 나오는 '나그네쥐'란, 정확히는 북미 지역과 노르웨이를 중심으로 한 북유럽에 서식하고 있는 [[나그네쥐]], 즉 '레밍'을 말한다. 즉, 위컴은 한국인들이 단순히 쥐새끼 같다고 말한 게 아니라, 앞의 레밍들을 무조건 추종하여 물에 빠지는 레밍처럼 당시 전두환을 추종하는 한국인들을 레밍의 행태에 빗댄 것이다. 또 만약 전두환이 합법적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해 국민적 지지기반이 있음을 증명하고 한반도의 안보 상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내부 안정이 우선이라며 "나는 한국인들이 내가 아는 민주주의를 실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."라고 발언했다. 원래 해당 기사는 위컴의 신분을 '고위급 미군장성'이라고만 소개해 익명으로 보도했지만, 그 인터뷰를 보고 빡친 전두환에 의해 '그 장성'이 위컴이라는게 밝혀져서 일이 커졌다.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국 대사의 말에 따르면, 이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든 것은 전두환이 8월 8일 [[뉴욕 타임즈]]의 헨리 스코트 스톡스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'미군 고위관계자'를 위컴이라고 밝혀 익명성을 제거한 것 때문이었다. 서울발 기사는 미국 언론에 크게 보도되어 이 기사가 한국 언론에 다시 보도되면서 기사 내용이 검열/왜곡되어 미국 정부가 전두환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[[둔갑]]해 물의를 더하면서 전두환은 환호했다. 이에 위컴은 자신의 견해가 잘못 전해졌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워싱턴과 서울에서 일고 있는 파장에 가장 당황했다.[* <알려지지 않은 역사(윌리엄 글라이스틴 저.)>. 중앙M&B. 1999. p228.][* 미 [[국무부]]는 위컴의 발언을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, 당시 미국에도 꽤 알려졌는지 위컴의 해당 발언에 대해 당시 미국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존 앤더슨은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한 [[지미 카터]] 대통령이 위컴의 발언을 시정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었다. 그러나 카터 역시 "한국인들은 그들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라도 (중략) 민주주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."고 발언했다.] 1983년에는 [[육군참모총장]]으로 [[영전]]했으며, 1984년 12월 19일에는 주한 미군 시찰차 방문 중에 대통령이 된 전두환을 청와대에서 공식적으로 만나기도 했다. 1987년에 [[퇴역]]한 후에는 애리조나 주 선시티의 시의회 의장을 역임했으며, 여럿 방산 기업들의 회장 자리와 미 국방부 장관 정책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